*** 채민은 많이도 얼떨떨했다. 여태 유리창을 토독토독 손짓 해주는 빗소리 덕분에 정신은 차리고 있었지만, 이 정신이 언제 휘발될지 장담할 수 없었다. 그토록 꿈에 그리던 순간이건만, 막상 눈앞에 당도하니 고장 난 로봇처럼 삐걱거렸다. 성에 눈뜨고 합법적 자유연애를 즐기던 강채민이 한 순간에 세상 물정 모르는 순진한 새신랑이 된 것 같았다. “괜찮아?” ...
“형.” 슬며시 붙잡았던 손은 떨어지자마자 저만치 멀어져 혼자 계단을 내려가고 있었다. 들리지는 않았지만 어쩐지 소헌의 발밑에서 쿵, 쿵 소리가 나는 것만 같았다. 소헌은 그대로 알렉의 파티장을 빠져나가 승강기로 다가갔다. 일련의 과정이 무척 재빨라서 채민은 뛰다시피 따라잡아야 했다. 그의 등 뒤로 자신을 부르는 일행의 목소리가 아스라이 흩어졌지만 신경 쓰...
[오늘 이야기 즐거웠어. 난 일행이 있어서 가볼게. 참, 크리스. 내가 연락할테니까 딱 기다려.] [네 파트너가 가만히 있겠어? 물론 난 언제나 환영이야.] 마지막 얼렁뚱땅 크리스와 농담까지 주고받으며 선선하게 인사를 나누고 환하게 돌아선 채민의 얼굴에는 금세 웃음이 감촉같이 사라졌다. [실례하지만, 키는 이정도고 까만 머리카락에 까만 눈동자를 가진 동양인...
소헌이 못 믿겠다는 얼굴이라 채민은 근거를 제시해 논리적으로 덧붙였다. “방금 형 손 잡고 부드럽다느니, 이름 듣겠다고 고개 갸웃하는 거 봤죠? 백퍼야, 백퍼.” “그냥 손 잡았으니 예의상 한 말이고 여기가 시끄러우니까 잘 안 들렸나 보지.” 소헌이 대수롭지 않게 넘기며 샴페인을 한 모금 마셨다. 부드럽게 넘어가는 맛이 괜찮았다. 기침도 멎었고 담 걸린 것...
*** “으흠.” 어지러운 방구석 한 편에 자리 잡은 전신 거울 속 자신의 몸을 훑어보며 나직한 소리를 내뱉었다. 창가 바로 앞 매트리스를 2단 올린 침대 위 이불은 꼬깃꼬깃 접혀 구석에 처박혀 있었다. 책상에는 까만 화면에 먼지가 알알이 붙은 노트북과 커피 자국이 선명한 머그잔이, 그 주변에는 부스러기가 널려진 과자 봉지 몇 개와 어학원에서 나눠준 프린트...
마음 같아선 대답이고 뭐고 형과 나는 이미 사귀는 거라고 하고 싶었으나 애써 담담하게 상기시킨 건 소헌을 배려한 거였다. “혹시라도 얘가 더 말 없는 거 보니 마음 접었구나- 하고 오해할까 봐요.” 아, 하고 어색한 듯 나직한 울림 후, 핫초코를 후후 불어 홀짝이는 소리만 대답처럼 들려왔다. “그렇다고 형에 대한 마음이 없어진다는 건 아니지만.” 기약없는 ...
한의원에서 처치를 받는 와중에도 옆에서 누구 씨가 하도 닦달을 해서 결국, 한 달 치 한약도 지었다. -괜찮다고 냅두다가 더 악화하는 경우 많이 봤어요. 다행히 뼈에 금 간 건 아니라니까 약 먹어야 빨리 낫지.- 채민의 성화가 아니더라도 약은 지을 생각이었다. 타지에서 아픈 것만큼 시간 낭비도 없었고. 그래도 그렇지. “야, 너 부자냐?” 나란히 닭볶음탕...
계단이 이렇게 많았나? 소리는 들리는데 얼굴이 보이지 않아 초조해질 무렵, 코너에서 쑥 올라온 머리가 뒤를 돌아 소헌을 보자마자 활짝 웃는다. 그 웃음에 소헌은 되레 표정이 딱딱해졌다. 그런데 가슴은 왜 이렇게 두근거리는지. 채민은 조그마한 다람쥐 캐릭터가 촘촘히 박힌 수면 바지를 입은 소헌을 보고 사랑하는 소년을 본 것처럼 내적 비명을 질러댔다. ‘제길,...
소헌은 뻔뻔한 낯짝으로 뱉어진 개소리에 헛웃음을 지었다. 이거, 순 양아치네. 양아치라도 밉지 않으니 자신이 좀 큰일 났다는 자각은 있었다. “말도 안 되는 소리 그만하고 잠깐, 좀 떨어져 봐. 야, 사람들 쳐다본다, 쫌!” 금세 주변으로 사람들이 스멀스멀 지나가기 시작했다. 어떤 이는 흘깃 두 사람을 보며 미소를 띄웠고, 누군가는 힐끔힐끔 눈알 돌리는 소...
[저희 다아시 보러 갈 건데.] 로열 크로센트의 독특하고 아름다운 초승달 모양의 건축물을 감상하는 사이 델라가 두 사람을 향해 슬며시 운을 뗐다. 소헌은 슬쩍 채민의 안색을 살피고 대답했다. [우린 여기서 쉬고 있을 게. 보고 와.] [형, 설마 벌써 지치신 건?] 형석이 이 중에서 제일 나이 많은 소헌에게 농담조로 물었다. [어휴, 그래. 난 늙어서 좀...
[헤이, 민! 어디가?] 채민은 소헌의 마음을 아프게 하지 않기 위해서라는 명분으로 정말 주는 술을 마다하고 여태 맥주 한 잔만 들이켠 상태였다. [더 얘기 안 들어도 돼? 우리 자리 옮길 건데.] 거기다, 정신이 말짱하다 보니 도리언 새끼의 시답잖은 유혹도 한낱 애들 소꿉장난처럼 느껴졌다. 아니 그보다 실은 진절머리가 날 지경이었다. 도대체 나는 왜 이 ...
사나래=사도화 쓰고 싶은 글을 씁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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