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다려요. 할 말 있으니까.” 언제까지 모른 척 할는지. 채민은 미꾸라지처럼 잽싸게 도망가는 가방을 - 적어도 채민의 눈에는 그렇게 보인- 낚아챈 후, 소헌의 손목을 붙들고 단호하게 말했다. 한숨을 내쉬고 포기한 얼굴이 제 손목을 가만히 바라보았다. 멍청하게도 몰랐던 것도 아닌데, 왜 자꾸 시선을 피하게 되는지 모를 일이었다. 소헌은 조금 아릿한 통증에...
오랜 시간 실패만 거듭한 사람은 아마도 무의식중에 방어기제가 발동하는지도 모르겠다. 소헌은 자신의 삶이 그러했으니 현재 얻게 된 넘치는 사랑 또한 그럴지도 모른다고, 그렇기에 적어도 상대와 비슷한 수준을 맞춰야 한다고, 그래야만 간신히 얻은 행운을 놓치지 않을 거라는 오판을 하는 걸 테다. 그건 틀렸다고 말해줘도 현재의 소헌이라면 쉽게 받아들이기 어렵겠지....
-뭐, 해요? 그도 좀 어색한지 본론을 꺼내지 못하고 빙빙 둘러댄다. “그냥…있었어.” 소헌도 작아지는 말끝을 사리물며 대답했다. 지은 죄도 있고 혼란한 마음탓에 어떻게 입을 열어야 할지 난감했다. 한동안 어색한 침묵이 감돌았다. 낯선 적요는 소헌의 마음을 더욱 침잠함으로 이끌었다. “미안해.” 그래도 간신히 벌어진 입 안에서 해야 할 말은 튀어나왔다. -...
“오빠!” 조심스럽게 어깨를 톡, 치며 다가온 윤희를 보며 애써 싱긋 웃어본다. “괜찮아요?” 소헌은 이틀 동안 수업을 빠지고 집안에 처박혀 홀로 무덤을 파고 들어가 생각과 감정의 꼬리에 잠식되어 있었다. 오해는 풀면 되고 잘못한 게 있으면 사과하면 된다. 그러나 별거 아닌 듯, 별거 같은 이번 일로 그 간단한 문장이 세상에서 제일 어렵다는 사실을 깨달았...
*** “끄으응…. 시발, 미쳤지….” 소헌은 간신히 상체를 세우고 앉아 두 손으로 머리를 쥐고 끙끙거렸다. 꾸물꾸물 이불 밖으로 나오는 몸이 천근만근이었다. 커다란 암석이 몸에 칭칭 감겨 땅 밑으로 잡아 당기듯 제 의지대로 움직이기도 힘들었다. 블라인드 틈새를 비집고 쨍한 햇살이 눈에 부셨다. 비척비척 자리에서 일어나 책상 위에 있던 생수병을 입에 물고 ...
채민은 거칠게 휴대폰을 침대 위에 던져 버렸다. 어제와 오늘 온종일 계약서와 변호사, 동료들의 말을 모아 추리고 협의하느라 하루가 어떻게 흘러갔는지도 모르겠다. 틈나는 대로 소헌에게 톡을 남기다가 못 참아서 겨우 전화를 했을 때는 숨통이 다 트이는 기분이었다. ‘이상했어.’ 하지만, 겨우 들었던 목소리는 어딘지 풀이 죽어 있었다. 아니, 더 정확하게 말하자...
[어, 맞아. 왜?] 상당히 퉁명스러운 대꾸에 어색해할 만도 하건만, 마테오란 녀석은 싱긋 웃더니 남아 있는 자리에 털썩 앉았다. [여기 좀 앉을 게. 다들 한국인이야?] 늦은 허락을 구하며 들고 있던 맥주를 기울인다. 어차피 오늘 펍에 모인 사람은 일반인을 제외하면 어학원 학생들이 대다수였고, 이렇게 인사하며 끼어드는 게 별난 일은 아니었다. [어. 넌 ...
조용한 사위로 팔랑, 팔랑 종이 넘기는 소리가 가라앉는다. 소헌은 다소 긴장한 표정으로 상대의 눈치를 흘깃거렸다. “으음. 이런 걸 그리시는구나. 혹시, 그릴 때 무슨 생각하는지 물어봐도 돼요?” 차분하고 진중한 물음에 소헌은 솔직하게 대답했다. “사실, 별다른 생각을 하면서 그리지는 않아요. 좀, 그리다 보면 무아지경이 된 달까?” 상대방은 이해한다는 ...
짧은 장마와 이른 태풍도 한 차례 지나간 터라 채민이 한국에 도착했을 때는 그리운 고국의 고온다습하고 지겨운 여름을 만끽 할 수 있었다. “이제 가도 되죠?” 짝, 하는 찰진 타격음이 채민의 등에서 시원하게 울려 퍼졌다. “이것도 자식이라고. 너 온 지 닷 새밖에 안 됐다, 이놈아.” 채민의 아버지 강광석께서 제 아들 등짝을 후려치며 볼멘소리를 하셨으나 아...
명단이 있으니 인터넷에서 찾아보면 주소는 금방 나온다. 소헌은 미처 생각지도 못했던 방향성에 작게 탄식하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럴 수도 있겠네. 근데 영어가 안 돼서….” “에이, 안 되기는. 형, 조만간 레벨업도 할 거면서. 형 정도 회화면 충분하죠. 그들도 외국인 상대로 하는 거니까 조금 어리숙해도 이해할 거예요. 한 번 가봐요. 가보고, 저 갔다 와...
채민의 바람대로 그날 하루는 파리지앵처럼 여유롭게 동네를 구경하고 지나가다 마음에 드는 상점이 있으면 들어가 구경했다. 날은 여전히 뜨겁고 바람 한 점 없이 무자비한 태양이 높이 솟아 있었으며 하늘은 더 없이 푸르고 맞잡은 손은 여전히 끈끈했다. 집으로 돌아와서는 사랑에 미친 사람들처럼 서로의 몸을 가지지 못해 안달을 피웠다. 열린 창을 통해 선선해지는 바...
사나래=사도화 쓰고 싶은 글을 씁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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