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L]한울겹(다시 만난 세상에서) 2부

다시 만난 세상에서

* 차는 번잡한 도로를 조용하고 느릿하게 움직였다. 퇴근 시간과 맞물려 꿈뜨게 이동중이지만, 지금은 그게 더 나은 상황이었다. “한득시 씨는 저희가 잘 말씀드렸습니다. 워낙 개방적이고 모난 곳이 없는 분이라 쉽게 이해해 주셨고요.” “그래요. 고마워요.” 여관욱은 백미러로 흘깃 뒷좌석을 살폈다. 김솔은 정호의 무릎을 베개 삼아 누운 채 잠들어 있었다. 색색...

다시 만난 세상에서

“네?” 그답지 않게 약간 높은 목소리가 튀어나갔다. 너무 황당하고 갑작스러운 제안이라 정호도 당황한 탓이다. 김솔을 포함 다른 사람들은 깜짝 놀라 숨을 헙- 멈추기까지 했다. 정호의 이미지가 나쁘지는 않지만 그렇다고 무섭지 않은 건 아니었다. 게다가 국내 굴지의 대기업 자제이지 않은가. 누구나 쉽게 말을 붙일 수 있는 상대는 아닌 것이다. 그러나 해맑은 ...

다시 만난 세상에서

정호의 말에 한동안 갸웃하던 김솔은 그 뜻을 이해하자마자 눈을 동그랗게 떴다. “그거 봤어?” 분명 기세 좋게 시작하긴 했다. 어쩐지 손가락에 붓끝이 착 와서 감기는 기분도 느꼈다. 먹물이 있었기에 먹을 오래 갈 필요는 없었지만, 그 모든 행위가 익숙하고 친근한 느낌이었다. 그러나 김솔은 분명 난생처음 해보는 거였다. 아니면 어릴 때 해본 적이 있었던 건 ...

다시 만난 세상에서

* “빛이 난다, 빛이 나.” 월화는 비딱하게 의자에 앉아 제 맞은편에 있는 정호를 게슴츠레한 눈으로 흘겨보고 있었다. 그녀의 핀잔이 섞인 진솔한 대답에 옆에 있던 여관욱도 어쩔 수 없이 대표의 얼굴을 뚫어지게 관찰하게 되었다. 역시나. 월화의 말처럼 정호의 얼굴은 잘 닦아놓은 구두처럼 반짝반짝 윤이 나다 못해 미끄덩 흘러넘치고 있었다. “휴가를 아주 기똥...

남은 사람들의 이야기 -완결

“허이고, 뭔 비가 이리 쏟아지나.” 그들이 숲에 들어서고 얼마나 지났을까. 비가 쏟아지기 시작했다. 소나기라고 하기에는 기세가 심상치 않았다. 거센 바람까지 불고 어디선가 벼락 치는 소리가 귓가를 웅웅 울려댔다. 여욱관은 박도영에게 들었던 이야기가 떠올랐다. ‘그도 이렇게 비와 번개가 쳤다고 했었지.’ 여욱관은 장대비로 뿌옇게 변한 시야를 둘러보았다. 잠...

남은 사람들의 이야기

* 세 사람의 찻잔 위로 가느다란 연기가 피어오르고 있었다. 뭉근하게 시야에서 사라지는 온기를 보며 도영은 입을 열었다. “먼 길 오시느라 다들 피곤하실터이니 바로 이야기 해 드리겠습니다. 사실은 저도 그 일이 정말 있었던 일인지 아닌지 지금도 혼란스럽긴 합니다. 라진에서 밀려 내려온 오랑캐들과 싸우느라 정신머리가 사라졌던 건지, 그 잠깐 사이에 꿈을 꿨던...

남은 사람들의 이야기

한울 겹 남은 사람들의 이야기 * 전쟁이 끝난 지 여섯 달이 다 되어가고 있었다. 저잣거리는 아직 집과 가족을 잃은 다친 병사와 굶주린 백성들로 가득했다. 겨우 앉혀놓은 임금은 그래도 나라를 버리고 도망간 왕보다는 나았다. 사람들은 그 하나에 마음을 달래며 이제나저제나 어서 빨리 일상을 꾸려나갈 수 있기를 희망하면서 근근이 하루를 이어가고 있었다. “어이구...

* 여 비서는 백미러로 뒷좌석을 흘끔거렸다. 전과 다름없는 여상한 분위기 속에 문서를 살펴보던 정호의 모습이 보인다. 정신없는 일들이 모두 해결되고 정리된 지 벌써 두 달이 지났다. 괴물 같은 회복력으로 다시 일상을 찾은 정호는 오늘도 여지없이 얼굴이 반질거렸다. 누구보다 사정을 잘 아는 여관욱으로서는 참으로 다행스러운 일이 아닐 수 없었다. 그 나름대로 ...